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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힐 땅도 없던 그들, 묘비는 삶의 기록이었다

이민자는 홀씨가 되어 삶을 살다 갔다. 이역만리 땅의 무덤들은 홀씨와 같았던 그들이 곳곳에 흩날린 흔적이다. 포틀랜드 중국계 이민자들의 지워질 뻔한 묫자리〈본지 10월30일자 A-1·3면〉를 찾아간 데 이어 한인 초기 이민자의 묘소를 보러 하와이로 향했다. 묘비는 망자들의 마지막 기록이다. 그들의 자취는 희미해지고 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정작 아시안 이민 역사는 방치됐다. 지난 10~17일까지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와 코나 커피로 유명한 빅아일랜드 등 하와이 열도 곳곳을 다녔다. 스스로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묘비에 새겨진 기록은 한인 초기 이민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   14일 오전 11시, 그 실마리를 잡기 위해 오아후섬 하와이주 의사당 앞으로 향했다. 와이키키에서 서쪽으로 약 3마일 떨어진 이곳은 호놀룰루의 중심이다. 의사당 왼편에는 한국전 전사자 기념비가 있다.   주의사당 직원 샘 바니는 “한국전에 참전한 하와이 출신 군인 중 407명의 전사자가 여기 검은색 대리석에 각각 새겨져 있다”며 “이중 한인 성씨는 10여 명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대리석 중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CHAN J P KIM JR’ (찬재 박 김 주니어)   미육군성에 따르면 34보병 연대 소속의 찬재 박 김 주니어는 당시 21세 나이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실종(1950년 7월8일)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주 한인 중 첫 포로다.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은 “호놀룰루 태생의 찬재 주니어는 하와이 첫 이민선에 탔던 ‘김찬재’ 씨의 셋째 아들”이라며 “아버지의 모국인 한국에 가볼 수 있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일본 주둔 미군에 지원했다가 한국전에 차출됐다”고 말했다.   아버지 김찬재씨는 일곱 살 때 하와이로 왔다. 1903년 1월 13일이었다. 인천 제물포에서 첫 이민자들을 실은 갤릭호가 호놀룰루 항 7번 선착장에 도착한 날이다. 그날 102명의 한인 중 한 명이었던 꼬마 찬재는 훗날 아들을 모국땅에서 잃을 줄 꿈에도 몰랐을 터다.   인근 오아후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찬재 주니어의 아버지 김찬재(1963년 사망)씨와 어머니 사라 박(1997년 사망)씨를 비롯한 900여 명의 한인 이민자가 안장돼있다.     당시 농장 노동자의 월급은 20달러 미만이었다.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고, 일부를 떼어 한국의 독립운동 자금까지 모은 이들이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그들은 자녀가 미국 땅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삶을 희생했다. 오늘날 이민자의 삶과도 맥락이 닿는 부분이다.   호놀룰루총영사관 이서영 총영사는 “올해 9월 총영사관과 국가보훈부는 오아후 묘역에 한글로 ‘고맙습니다’를 새긴 기념비도 세웠다”며 “누아누메모리얼파크, 다이아몬드메모리얼파크, 하와이안메모리얼파크 묘역에도 한인 초기 이민자가 다수 안장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당시 호놀룰루에 첫발을 내디딘 한인들은 대부분 인천내리교회 소속 교인이다. 그들이 도착 후 세운 건 교회와 학교다.   주의사당 건너편 정부 건물 앞에는 표석 동판이 하나 있다. 한인기숙학교(1906년 개교)의 터였음을 알린다.     민주평통 하와이협의회 박봉룡 회장은 “당시 한인들이 무려 2000달러를 모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한인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세워 달라고 요청해 만들어진 학교”라며 “한인 노동자들은 각 농장에서 젊은 인재를 뽑은 뒤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인기숙학교로 유학까지 보낼 정도로 미래를 내다봤었다”고 말했다.   주의사당에서 동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로 향했다. 해외 최초의 한인 이민 교회(1903년 11월10일 설립)다. 입구에는 갤릭호에 탔던 첫 한인 이민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교회 한의준 담임 목사(22대)는 “첫 이민단이 도착한 후 을사늑약으로 이민이 금지된 1905년까지 7415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왔다”며 “처음 도착했던 이민단은 대부분 오아후 북쪽 와이알루아 지역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됐다”고 말했다.    흔적을 찾기 위해 교회에서 북쪽으로 30여 마일 거리의 와이알루아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사탕수수밭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차창 너머로 파인애플밭과 커피나무 밭이 100여 년 전 풍경을 대신한다.     와이알루아 지역 푸우이키 묘지에 도착했다. 당시 농장에서 일했던 첫 한인 이민자 중 30여 명 정도가 묻혀있는 곳이다.   묘지는 고요하다. 산들바람만이 적막을 깬다. 한인 이름이 적힌 묘비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들의 노고에 비해 묘비의 자태는 쓸쓸하다.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비석이 눈에 띈다. 일부는 글귀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찾는 이가 없어 방치된 지 오래된 게 분명하다.   이덕희 소장은 “당시 한인들은 죽어도 묻힐 땅이 없다 보니 농장주가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 한편에 묻기도 했다”며 “당시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을 제외하고 이후 사진 신부 등으로 온 사례를 합하면 결국 4500명 정도가 오늘날 한인 이민사의 시작점이 된 것”이라고 전했다.   홀씨와 같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이제 별로 없다. 마지막 기록인 묘비만 외롭게 서 있다.   호놀룰루=장열 기자ㆍ사진 김상진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한인 이민자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한인 초기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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